암호화폐 업계가 그토록 기다리던 특정금융정보법(특금법) 시행령이 드디어 나왔습니다. 하지만 앞서 유출된 시행령에서 우려조항으로 손꼽혔던 부분들이 개선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나오면서 업계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지난 2일 금융위원회 금융정보분석원(FIU)은 특금법 시행령 개정안을 입법예고했습니다. 지난 3월 특금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지 8개월 만입니다. 당초 특금법 시행령은 9월 경에 나올 것으로 예상됐습니다. 하지만 작업이 늦어지면서 11월이 되어서야 시행령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특금법 개정안은 암호화폐를 취급하는 가상자산사업자(VASP)들이 기존 금융기관에 준하는 자금세탁방지 의무를 수행하며 영업하도록 한 제도입니다. 특금법 이후 VASP가 영업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FIU에 사업자로 신고하고 인가를 얻어야 합니다. 특금법 시행령은 여기서 어떤 기업이 VASP에 해당하고, 어떤 의무를 준수해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특금법 신고 대상은?…암호화폐 거래·보관에 직접 관여하는지가 기준

그럼 특금법은 어떤 기업들이 신고 대상이 될까요? 시행령에 따르면, 암호화폐 매매, 교환, 이전, 보관, 관리, 거래 중개 등의 행위를 영업으로 하고 있다면 모두 신고 대상이 됩니다. 암호화폐 거래업자, 보관관리업자, 지갑 서비스 업체 등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개인간거래(P2P)를 게시하는 장을 제공하는 경우, 암호화폐 거래에 대한 조언이나 기술을 제공하는 경우는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또 고객의 암호화폐를 직접 보관하지 않고 개인 암호키 등을 보관하는 프로그램 자체만 제공하는 경우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쉽게 말해 기업이 고객 암호화폐 송금 행위에 관여하는지 여부가 신고 기준이 됩니다.


어떤 요건을 갖춰야 하나?…열쇠는 은행이 쥐고 있다

다음으로, VASP로 신고하려면 어떤 요건을 갖춰야 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FIU로부터 사업자 신고 수리를 얻으려면 정보보호관리체계(ISMS) 인증을 얻고, 은행으로부터 실명확인 입출금계좌를 발급받아야 합니다. 시행령에 따르면 VASP가 실명계좌를 발급받기 위한 요건은 크게 5가지입니다.

①고객 예치금을 분리 보관할 것, ②정보보호관리체계(ISMS) 인증을 획득할 것, ③신고 불수리 요건(벌금 이상 형 선고 후 5년 경과 이전)에 해당하지 않을 것, ④고객 거래내역을 분리 관리할 것 등입니다. 문제는 마지막 조항입니다. '금융회사(은행)는 VASP가 자금세탁방지를 위해 구축한 절차·업무지침을 확인해 금융거래 등에 내재된 자금세탁 위험을 식별·분석·평가해야 한다'고 명시돼 있습니다.

요건 1~4번은 내용이 비교적 객관적이고 명확한 반면, 5번은 '은행의 주관적인 평가'에 따라 여부가 달라질 수 있는 부분입니다. 물론 자금세탁방지 조치에 대한 확인이 투명하게 이뤄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에 비춰볼 때 기대하기 어려운 게 현실입니다.

현재 은행으로부터 실명확인계좌를 발급받고 있는 암호화폐 거래소는 빗썸, 업비트, 코인원, 코빗 등 이른바 4대 거래소 뿐입니다. 나머지 거래소들은 아직도 실명확인계좌를 발급받지 못해 특금법 시행령을 기다려 왔습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는 실명확인계좌를 발급할 수 있는 제도적 여건이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열쇠 주인은 누구?…제도 바뀐다고 해결될까

정부는 2017년 말 뜨거웠던 암호화폐 투기 열풍을 잠재우기 위해 암호화폐 거래실명제를 실시하고, 기존 가상계좌를 통한 거래는 차단했습니다. 또 신규 투자자 유입을 차단하기 위해 시중은행의 실명계좌 발급에 제동을 걸었습니다. 이후 은행들은 4대 거래소에만 실명확인계좌를 발급하고 나머지는 차단하는 조치를 이어왔습니다. 이에 대해 정부는 '은행들이 판단할 일'이라며 은행에 책임을 미뤘고, 은행은 '정부 정책 기조를 따른 일'이라며 눈치를 살펴왔습니다.

업계는 암호화폐에 대한 이러한 분위기가 특금법 심사에도 여전히 작용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은행이 투명하게 기준을 정하고 공개하지 않는 이상 위와 같은 일이 다시 발생하지 않으라는 보장이 없다는 겁니다. 결국 정책 기조가 큰 틀에서 바뀌지 않는 이상 은행 입장에서는 리스크 관리를 위해 보수적으로 운영할 수 밖에 없다는 얘기가 됩니다. 많은 회원을 보유하고 있는 대형 거래소를 제외하고는, 수익보다 리스크가 큰 다수의 거래소에 나서서 실명확인계좌를 발급할 이유가 없는 셈이죠.

얼핏보면 특금법의 열쇠는 은행들이 쥐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배후에는 여전히 금융당국의 정책 기조와 입김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부는 업계가 기대해온 것처럼 특금법을 계기로 암호화폐에 대한 태도를 바꿨다고 볼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금융위는 특금법 시행령 관련 Q&A에서 '특금법 시행이 암호화폐 제도화를 의미하는가' 하는 질문에 "특금법은 국제기준인 자금세탁방지기구(FATF) 권고에 따라 VASP에게 자금세탁방지의무를 부과하는 것일 뿐, 제도화는 아니다"라고 명시했습니다. 결국 블록체인은 육성하고 암호화폐는 규제하겠다는 기존의 큰 원칙 아래, 자금세탁방지 의무를 VASP에게 부여했다고 봐야겠습니다.

업계가 기대를 걸어온 특금법과 시행령이 기존 환경과 마찬가지로 불확실한 측면이 많다는 점에서 VASP들은 미래 사업성에 대한 빠른 판단이 필요하다고 보입니다. ISMS 인증 획득과 자금세탁방지 시스템 구축에 많은 비용과 시간, 노력이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한 손실은 온전히 기업의 몫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나아가 정부도 향후 암호화폐 시장에 온전히 대응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이고 종합적인 대책을 내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의 특금법은 자금세탁방지 규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변화하는 미래 환경에 유연하게 대응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업계가 특금법 준수를 통해 암호화폐 시장에 대한 규제를 이행해나가는 것처럼, 정부도 업권법을 마련하고 책임있는 자세로 업계와 논의하는 자세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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